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폴란드 오시비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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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난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우슈비츠를 들르기로 하고 숙소 체크아웃중 찍어본 하늘.









주차장에서도 한장.





아우슈비츠는 다들 잘 아는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죄수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잡아 수용하고, 가스실에서 학살한 곳.



아우슈비츠 앞에 있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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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를 통틀어 아우슈비츠는 테러, 집단학살,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되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하고 오시비엥침 외곽에 캠프를 설치하였는데,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라고 칭했고, 현재까지 이어진 캠프의 이름이다.

그 다음해까지 세개의 메인 캠프,

아우슈비츠 I,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 아우슈비츠 III-모노위츠와 40개 이상의 서브 캠프로 확장되었다.

처음으로 아우슈비츠에 수감자로 끌려와 살해된 사람들은 폴란드인이었고, 이어서 소련의 전범, 집시,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 끌려왔다.

1942년 초, 나치는 유럽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아우슈비츠가 그 전초기지가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대부분을 차지한 유대인-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비르케나우에 있는 가스실로 향해졌다.

전쟁의 끝이 임박함을 느낀 SS(나치 친위대)는 여기서 이루어진 잔학한 행위들의 증거를 없애려고 했다.

그들은 가스실, 화장터, 다른 건물들을 해체했고, 서류들을 불태웠으며, 걸을 수 있는 죄수들은 독일 내륙으로 이동시켰다.

이동되지 않은 죄수들은 1945년 1월 27일 Red Army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는 아우슈비츠 I 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II 자리에 주립 박물관을 세우기로 결정했으며,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곳에서 고통받고 죽은이들에 대해 경의하고 기리는 마음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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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하면 흔히 생각하는 철도와 넓은 그곳.은 아우슈비츠 II - 비르케나우 이고,

 ARBEIT MACHT FREI 표시가 있는곳은 아우슈비츠 I


관광지로 유명한곳은 아우슈비츠 I 이고, 한국 단체 관광도 이곳으로 많이 가는듯.




크라쿠프에서 출발해서 표지판을 따라가다보니 도착한곳은 아우슈비츠 II - 비르케나우.









유명한 그 철도.







지도에서 보이는 A가 아우슈비츠 I 이고,

B 지역이 아우슈비츠 II - 비르케나우 이다.







먼저 아우슈비츠 I 을 보고 오기로 하고,

I - II 간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하여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기다리며 사진도 몇장 찍어보고...







버스 탑승은 무료.







아우슈비츠 I 은 memorial museum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도 줄이 꽤 긴 상태.


개별 관람은 불가능하고, 가이드를 동반한 20명정도의 그룹으로 관람을 하게 된다.

소금광산과 마찬가지로 언어별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까지 기다려야 함.


큰 가방은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여 지하에 있는 물품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유료)

(손가방정도는 허용)

화장실도 유료이고, 1즈워티.

환전소는 1층에 있긴 하다.


급하지 않다면 수용소 안쪽 화장실도 있다.

이곳은 무료인듯 하고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겠지)

난 가이드 따라다니느라 바빠서 들어가보진 못했다. 엔하위키에 따르면 들어가보는걸 추천. 이라고 한다.

























ARBEIT MACHT FREI

독일어이고, 의역하자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라 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뿐.












단순히 겉 분위기로는 잘 꾸며진 동네와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
















수용소는 몇개의 블럭(건물)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건물 안에 박물관처럼 관람 코스가 형성되어 있는 모양.


















어느 건물 복도에 걸려진,

수용자들의 사진들.
















가스실 모형...

mass murder.






독가스로 사용된 시클론B 가스(고체)가 담겨있던 깡통.....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미국 철학자(유럽 태생)인 조지 산타야나....



처칠이 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나,

신채호선생이 말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와도 뜻이 통하는 말.















초기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가 전후 교수형을 당한 곳.






가스실 굴뚝...




내부....








가스실을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 관람이 끝날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

잠시 비를 피하고 있다가 가이드와 함께 아우슈비츠 II - 비르케나우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







가이드를 대동한 상태에서는 입구의 망루(?)에 올라갈 수 있다.




북쪽






남쪽






그 기차길.


멀리 보이는 철도 사이의 공간이 실어온 사람들이 내린 하차장.

































아우슈비츠II-비르케나우에는 가스실이 두곳이 있었는데

두곳 모두 독일 후퇴시 폭파시켰다.


하지만 그 폭파 흔적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여

만행을 대대로 알리고,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었다.























나오는도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



중간쯤 있던 건물의 처마 밑에서 비를 잠깐 피하다

좀 그치는것 같아 나오는데 또다시 폭우....


비를 완전히 쫄딱 맞고

근처 주유소 옆 식당에서 옷 갈아입고 왔다.




우리나라에도 일제의 만행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가 있지만,

도덕성과 인간성이 사라진 자들이 저지르는 일은 정말 극악무도하다...






아래 글들은 아우슈비츠 I 의 여기저기 표지판에 써있던 내용들.

짧은 영어실력으로나마 남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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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인 수감자가 탈출하면 다른 가족들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가족들은 도망자가 잡힐때까지 그들이 잡힌 이유를 알리며 캠프에 남아 고통받아야 했다.

이때문에 다른 수감자들도 이 규칙에 대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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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봄까지 KL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에게 신분 확인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했다.

이후 독일 수감자와 일부 국적 수감자들만 사진을 남겼고, 한꺼번에 다수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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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 아우슈비츠는 나치 캠프중 유일하게 수감자들이 수감번호를 문신으로 새겼다.

이유인즉, 대량 학살시 시신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1941년 가을에는 소련 전범들에 대해 문신이 행해졌으나,

1943년 봄부터는 모두에게 문신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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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굶주림은 수감자들의 죽음의 주된 원인이었다.

하루 배급량은 1500~1700Kcal 정도였지만 수감자들은 매일 하루 11시간정도의 노동을 해야 했다.

다른 보충식을 찾지 못한 수감자들은 대부분 캠프에 온지 몇 달 안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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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KL 아우슈비츠로 232,00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끌고왔다.

여기엔 216,000명의 유대인, 11,000명의 집시, 3,000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1,000명의 다국적의 슬라브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 어린이들은 도착 즉시 가스실로 향했고, 대략 22,00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로 등록되었다.

1945년 1월 27일, Red Army는 15세 미만 450명을 포함한 65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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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26일부터 같은해 8월 중순까지 1~10 블럭은 여성 수감자들의 캠프로 사용되었고,

남성 수감자들의 캠프와 높은 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독일과, 독일 점령지의 약 17,000명의 여성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이 4개월동안, 몇천명의 여성들이 가스실로 보내지거나,

캠프 내 굶주림, 전염병, 부실한 위생, 노동 노예로 사망하였다.

1942년 8월까지 생존한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의 섹터 B I 로 이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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